목차
초대의 말 ... 6
01 명동 거리 - 1969년 10월 서울 명동은 꽃 피는 봄날처럼 향기롭고 눈부셨다 ... 15
02 남성 패션모델 클럽 왕실 - 모델이란 직업으로 먹고살기는 어렵겠지만 머잖아 좋은 날이 올 겁니다 ... 35
03 이용화양복점 - 많은 양복점들이 현금을 긁어모았고 내게는 명동의 양복점 사장이 어느 은행장 부럽지 않아 보였다 ... 47
04 한국 양복업계 - 분명 원단 제조사의 잘못인데도 모든 책임을 양복점이 고스란히 져야만 했다. 그게 당시의 관례였다 ... 63
05 초년고생 - 이 무렵 나의 단골집은 삼각동 수제비 집이었다. 50환짜리 수제비 한 끼로 하루를 버텼고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 95
06 양복점 개업 - 찰스 김 테일러를 기반으로 하여 5년 후인 1975년까지 자수성가하겠다는 각오로 전화번호도 1975번으로 정했다 ... 111
07 찰스 김 테일러 - 당시 양복 한 벌 가격은 2만 원 내외로 웬만한 회사원 한 달 봉급에 맞먹는 적잖은 금액이었다 ... 125
08 새마을운동 -〈새마을노래〉가 온 나라에 울려 퍼지던 이때, 섬유업계의 호황은 복장계에도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 143
09『복장계』- 대부분의 수입을 숨 돌릴 틈 없이「복장계」만드는 일에 쏟아 부었다. 그야말로 밑 빠진 독에 물 붓는다는 게 어떤 건지 실감이 갔다 ... 157
10 검열 - 당장 배포된 잡지들을 몽땅 거둬들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통보였다. 이미 1000여 권 이상이 시중 양복점과 업체 등에 풀려 나간 상태였다 ... 177
11 자금난 - 사채를 끌어다가 원단을 사서 6개월 할부로 맞춤 양복을 팔고 할부 대금을 깔아놓은 상태라서 현금은 늘 모자랐다 ... 197
12 시대의 악몽 - 세상이란 게 나 혼자만 떳떳하다고 내 편을 들어주는 게 아니라는 것도 당시에는 몰랐다 ... 207
13 구치소 생활 - 6개월 만에 구치소를 나와보니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더 이상 내가 살던 세상은 없었다 ... 217
14 무대의상 제작 - 이 나라 연극사 이래 가장 큰 극장, 가장 큰 무대에서 가장 많은 물량과 인원의 투입으로 만들어진 엄청난 모험이 심판대에 올랐다 ... 229
15 마지막 대형 무대 - 마치 등대 없는 암흑 속 항해처럼 느껴지던 첫 공연이 성황리에 끝났다 ... 243
저자의 말 ... 255
자료 ... 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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