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일부
역자 서문 ... 3
조익의『이십이사차기』자서(自序) ... 23
권1
1. 사마천이 역사(『史記』)를 저술한 햇수(司馬遷作史年歲) ... 25
2. 반고가 역사(『漢書』)를 저술한 햇수(班固作史年歲) ... 30
3. 각 정사간의 체례와 편목의 차이(各史例目異同) ... 33
본기 ... 35
세가 ... 39
표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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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전체
역자 서문 ... 3
조익의『이십이사차기』자서(自序) ... 23
권1
1. 사마천이 역사(『史記』)를 저술한 햇수(司馬遷作史年歲) ... 25
2. 반고가 역사(『漢書』)를 저술한 햇수(班固作史年歲) ... 30
3. 각 정사간의 체례와 편목의 차이(各史例目異同) ... 33
본기 ... 35
세가 ... 39
표 ... 42
서와 지 ... 47
열전 ... 48
4.『사기』의 편목과 차례(史記編次) ... 53
5. 저소손이『사기』를 보충한 것은 10편만이 아니었다(?少孫補史記不止十篇) ... 54
6.『사기』가운데 후인들이 잘못 끼워 넣은 곳(史記有後人竄入處) ... 62
7.『사기』의「율서」는 곧「병서」였다(史記律書Ss兵書) ... 64
8.『사기』의 변체(史記變體) ... 66
9. 한왕(유방)의 부모처자(漢王父母妻子) ... 68
10. 다섯 대에 걸쳐 한나라의 재상을 지냄(五世相韓) ... 71
11.「과진론」이 인용된 세 곳(過秦論三處引用) ... 72
12.『사기』안에서 서로 어긋나게 서술한 곳(史記自相岐互處) ... 74
13.『사기』와『한서』가 다른 곳(史漢不同處) ... 78
14.『사기』와『한서』는 서로 장단점이 있다(史漢互有得失) ... 95
해하(垓下)의 전투 ... 95
고조기(高祖紀) ... 96
효문기(孝文紀) ... 96
오왕비전(吳王o蓑?) ... 97
일곱 나라의 반란 때(七國反時) ... 98
네 제후국이 임치를 공격한 때(四國攻臨꺫時) ... 100
회남려왕전(淮南S꿱榧?) ... 100
권2
15.『한서』에서『사기』의 문장을 옮겨 둔 곳(漢書移置史記文) ... 102
16.『한서』에는 유용한 문장을 많이 수록했다(漢書多載有用之文) ... 112
17.『한서』에서 열전을 덧붙인 곳(漢書增傳) ... 115
18.『한서』에서 사적을 덧붙인 곳(漢書增事蹟) ... 119
「한신전(韓信傳)」 ... 119
「초원왕전(楚元王傳)」 ... 120
「소하전(蕭何傳)」 ... 121
「왕릉전(王陵傳)」 ... 121
회남왕(淮南王) 안(安)이 문학(文學)과 신선(神仙)의 일을 좋아한 일 ... 122
「석경전(石慶傳)」 ... 123
「이광전(李廣傳)」 ... 123
「위청전(衛靑傳)」 ... 123
「공손홍전(公孫弘傳)」 ... 124
「정당시전(鄭當時傳)」의 끝 ... 125
19.『한서』의 항산왕에 대한 서술(漢書書恒山王) ... 126
20.『한서』는 무제기의 찬에서 무공을 말하지 않았다(漢書武帝記贊不言武功) ... 127
21. 한의 황제들 스스로 묘를 세운 자가 많다(漢帝多自立廟) ... 132
22. 한나라 초기의 포의 출신이 장상이 된 국면(漢初布衣將相之局) ... 133
23. 한나라 초의 제후왕은 스스로 관속을 임명하였다(漢初諸侯王自置官屬) ... 140
24. 무제의 연호는 원수 이후에 소급해서 만든 것이다(武帝年號係元狩以後追建) ... 143
25. 한의 유지들이 재이를 말하다(漢儒言災異) ... 145
26. 한나라는 일식을 중시했다(漢重日食) ... 155
27. 한나라의 조칙에는 두려워하는 말이 많다(漢詔多懼詞) ... 158
28. 한나라 때 경서의 뜻으로 일을 처리하였다(漢時以經義斷事) ... 162
29. 현량 방정 무재 직언은 현임관이 많이 천거되었다(賢良方正茂材直言多擧現任官) ... 167
30. 한나라 때 여러 왕국은 각각 독자의 연도로서 기록했다(漢時諸王國各自紀年) ... 170
31. 삼로 효제 역전은 모두 향관(鄕官)의 이름이다(三老孝悌力田皆鄕官名) ... 172
32. 한나라의 삼공관(漢三公官) ... 173
33. 재이로서 삼공을 책면하다(災異策免三公) ... 178
34. 상서함에 기휘하는 바가 없었다(上書無忌諱) ... 183
35. 상서를 올리면 불러서 만나보았다(上書召見) ... 184
36. 한 무제가 장군을 부리는 방법(漢武用將) ... 187
37. 무제의 세 대장은 모두 총애하는 여인으로 인해 발탁되었다(武帝三大將皆由女寵) ... 192
38. 소무와 같이 사신으로 출행한 자(與蘇武同出使者) ... 194
권3
39. 한나라 사신들이 먼 이국 땅에서 공을 세우다(漢使立功}U域) ... 197
40. 무제 때 형벌의 남발(武帝時刑罰之濫) ... 205
41. 두 황제가 도둑을 잡는 방법의 차이(兩帝捕盜法不同) ... 206
42. 여후와 무후는 나란히 칭할 수 없다(呂武不當N&稱) ... 208
43. 한나라 초기 후비들은 미천한 출신이 많았다(漢初妃后多出微賤) ... 214
44. 항렬을 따지지 않는 결혼(婚娶不論行輩) ... 216
45. 황제의 아들은 어머니의 성을 따랐다(皇子繫母姓) ... 217
46. 한나라 공주들은 샛서방을 꺼리지 않았다(漢公主不諱私夫) ... 218
47. 한나라 제후왕들의 문란함(漢諸王荒亂) ... 220
48. 질 좋은 술과 특별히 사육된 소(上尊養牛) ... 223
49. 전한과 후한 때에 봉황이 많았다(兩漢多鳳凰) ... 226
50. 한나라에는 황금이 많았다(漢多黃金) ... 229
51. 선생이란 말은 다만 한 글자로 칭하기도 했다(先生或只稱一字) ... 233
52. 한나라 때 외척의 정치 보과(漢外戚輔政) ... 235
53. 전한과 후한 때 외척들이 입은 재난(兩漢外戚之禍) ... 238
54. 전한과 후한 때에는 상복에 정해진 법도가 없었다(兩漢喪服無定制) ... 245
55. 상관에 대한 상복(長官喪服) ... 251
56. 왕망의 패망(王莽之敗) ... 255
57. 왕망 때 군사를 일으킨 이들은 모두 한나라의 후예임을 칭했다(王莽時起兵者皆稱漢後) ... 260
58. 왕망은 스스로 자기 자손을 죽였다(王莽自殺子孫) ... 267
59. 왕망은 경서의 뜻을 끌어다 자기의 간사함을 꾸몄다(王莽引經義以文其奸) ... 270
권4
60.『후한서』편찬 차례에 대한 정정(後漢書編次訂正) ... 273
61.『후한서』에는 간혹 소략하거나 빠진 대목이 있다(後漢書間有疏漏處) ... 284
62. 한나라 황제들은 스스로 조서를 짓는 경우가 많았다(漢帝多自作詔) ... 295
63. 광무제는 참위서를 믿었다(光武信讖書) ... 299
64. 광무제는 노비를 많이 해방시켰다(光武多免奴婢) ... 308
65. 동한 공신에는 유학자에 가까운 사람이 많았다(東漢功臣多近儒) ... 310
66. 동한 때에는 사천묘에서 따로 제사를 드렸다(東漢四親廟別祭) ... 315
67. 동한 여러 황제들은 오래 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東漢諸帝多不永年) ... 320
68. 동한에는 모후가 임조하고 방계황족이 들어와 제위를 잇는 경우가 많았다(東漢多母后臨朝外藩入繼) ... 322
69. 방계황족이 들어와 제위를 이으면 친부모를 추존했다(外藩入繼追尊本生) ... 325
70. 남편이 생존해 있는 데도 태를 칭한 경우(夫在稱太) ... 329
71. 동한 때 폐위된 태자들은 모두 목숨을 보전했다(東漢廢太子皆保全) ... 330
권5
72. 여러 세대에 걸친 경학(累世經學) ... 335
73. 사대에 걸쳐 삼공(三公)을 배출하다(四世三公) ... 341
74. 동한에서는 명예와 절개를 숭상하였다(東漢尙名節) ... 344
75. 조아와 숙선웅(曹娥叔先雄) ... 354
76. 인재를 불러 등용하는 데에 자격을 따지지 않았다(召用不論資格) ... 355
77. 마음대로 벼슬을 떠나는 것을 금지하지 않았다(擅去官者無禁) ... 357
78. 몰수한 재산으로 백성들의 조세를 대신하였다(籍沒財産代民租) ... 360
79. 다른 사람을 고용해 대신 문장을 짓고 글을 쓰다(P)代文字) ... 362
80. 당인에 대한 금고의 기원(黨禁之起) ... 363
81. 동한시대의 환관(東漢宦官) ... 371
82. 환관이 백성에게 끼친 해악(宦官之害民) ... 380
83. 한나라 말엽 여러 신료들이 환관을 탄핵하고 다스렸다(漢末諸臣劾治宦官) ... 386
84. 환관 가운데에도 또한 어진 이가 있었다(宦官亦有賢者) ... 3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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